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문단 편집) == 평가 == FDR은 [[장애]]를 극복하고 대통령이 되어, [[대공황]]으로 수렁에 빠져있던 당시 [[미국]]에 희망을 불어넣고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내, 오늘날에도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미국은 FDR의 집권기를 거치며 세계 제1의 초강대국이 되는데, [[대공황]]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을 대신해 세계를 이끄는 지도국가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고,[* 세계사에서 미국 대통령이 세계의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된 것도 루스벨트 이후부터다. 이를 두고 역사상 가장 평화적인 패권 교체기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당사국들간 잡음이 적었던 것엔 추축국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었던 점도 한 원인이었다.] 종전 후에는 명실상부한 세계 제1의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된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 교과서에도 자주 나오는, 상기된 [[얄타 회담]] 당시 정중앙에 앉은 루스벨트의 모습이다.] 이후 [[유엔]] 창설 등을 준비하며 전후 국제 질서의 틀을 구축하는 데도 노력했다. 한편, 다양한 평이 존재하는 민주 사회답게, [[매카시즘]]으로 유명한 [[조지프 매카시]] 같은 그 시절 미국내 극우파 인사는 루스벨트와 후임 [[트루먼]] 정권을 싸잡아 '반역의 20년 정권'이라고 몰아세우기도 했는데, 이런 FDR의 안티들은 뉴딜 정책의 성과가 생각만큼 크진 않으며, 불황 탈출도 전쟁 특수가 한몫 했다는, 지금도 논란이 분분한 논리와 함께 자유시장경제를 왜곡했다는 비판도 한다. 실제 전쟁 특수를 보긴 했는데, 예를 들어 본격적인 전시 체제에 돌입한 미국의 실업률은 무려 1%까지 떨어진다. 이는 장애인 빼고 전부 일자리가 있는 완전 고용 상태 수준이었다. 물론 그 전쟁 특수란 것도 못 이용해먹는 지도자들이 많은걸 생각하면 사실 자가당착.[* 당장 2022년 벌어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만 봐도 알 수 있듯 주변국들이 전쟁 특수는커녕 세계 물가만 더 치솟아 오히려 경제가 나빠졌다.] 애초에 후술되어있듯 경제 패러다임 자체가 이때를 계기로 한번 크게 바뀌기에 사실 좀 부질없는 메아리기도 하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바로 개입하지 않아 유럽이 초토화되고, [[유대인]]들도 [[홀로코스트]]를 당하는 등 방관자였다는 평가를 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는 당시 미국 자체가 여론과 의회가 모두 전쟁 참여 자체에 부정적이었다는 것을 망각한 오해와 착각일 뿐, 오히려 루스벨트는 [[무기대여법]] 같은 편법으로 연합국을 돕는 등 최선을 다했다는 반론도 있다. 적어도 학계에선 당시 루즈벨트가 연합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지원 방법을 강구했다는 것을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당장 중일전쟁만 해도 루스벨트는 중국에 물자를 대주고 일본의 석유 수출길을 가로막으며 사실상 일본의 중국 철수를 강하게 압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사태를 초래한 [[만악의 근원]]은 [[아돌프 히틀러]]지 애꿎은 루스벨트가 아니다. 어쨌든 이런 여론을 돌리는덴 [[에드워드 머로]]의 나치-영국 본토 항공전 중계 등 언론이 한몫을 했고, 결정적으로 [[일본제국]]의 [[진주만 공습|무모한 도발]]이 기폭제를 당겼다. 이외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하여 2차 세계 대전 당시 엄연히 미국적자였던 [[독일계 미국인|독일]], [[이탈리아계 미국인|이탈리아]], [[일본계 미국인]] 같은 적국 출신 자국 이주민들을 강제 수용한 것이나 [[1936 베를린 올림픽]]의 금메달 4관왕 주인공 [[제시 오언스]]에게 축하 연락하거나 백악관에 초청하지 않는 등 뭔가 무시한듯한 스탠스를 보인 것도 그의 오점으로 꼽히는데,[* 역설적으로 극단적인 인종차별 정책을 펼치던 [[아돌프 히틀러]]가 오언스를 (예의상) 환대해 주는 일화도 있었다.] 루스벨트 개인의 호불호는 둘째치고 루스벨트 시절은 인권 운동가로 유명했던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등의 활약으로 인종주의는 오히려 어느 정도 해소되던 시기였다. 즉 루스벨트 개인은 인종차별주의자[* 라파엘 메도프의 발언에 따르면 유대인도 싫어했다고 한다.]라 생각될만한 일들을 좀 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비백인 인종에게 많은 것을 해준 것도 루스벨트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4선을 하며 [[자유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장기 집권의 씨앗을 낳을 뻔한 점도 비판받는 부분이다. 이전까지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았어도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임기를 두 번만 치르고 깔끔하게 물러나면서 후임 대통령들도 2선까지만 하고 그쳤는데, 루스벨트만 관례를 깨고 4선을 하는 바람에 이후 3선 이상을 금지하는 헌법 조항이 명문화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다만 장기 집권을 한다고 무조건 민주주의 후진국이라고 보긴 애매한 점도 있는 것이,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평가받는 일부 유럽 국가에서도 (물론 공정한 선거를 통해서) 10~20년 이상씩 장기집권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종종 나온다. 대표적인 인물로 스웨덴의 타게 엘란데르나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등이 있다. 물론 이런 나라들은 주로 내각제 국가란 약간의 차이는 있다.] 결국 4기 임기에 들어선지 3달만에 루스벨트는 사망하는데 이렇게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서까지 집권한 것이 [[제2차 세계 대전]] 등의 어떤 책임감 때문인지 권력욕 때문인지 아님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본인만이 알 일이다. 한편, 리버럴 진영에서는 [[뉴딜 정책]]이 가축 대량 살처분 같은 부작용도 일부 남겼지만, 이때 추진한 여러 정책 중 상당수는 이후 서구권에서 수십 년간 이어진 자본주의 황금기를 만드는 토대가 되었고, 실제 뉴딜 정책 이후 경제학계의 주류로 올라선 [[케인즈주의]]를 언급하며 세계 경제학의 기조 자체를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실제 이때 많은 노동권 신장이 이뤄지며 이후 아이젠하워 등 공화당 정부도 뉴딜 정책 당시 수립된 다수의 정책들을 계승했고, 지금도 사회보장제도 등의 형태로 남아 있다.[* 흔히 뉴딜을 댐 건설 같은 경기부양 정책이 다였다고 오인하는 경우도 있는데, 뉴딜은 경기부양책 뿐만 아니라 시장 개혁과 양극화 해소를 위한 부당노동행위금지, 최저임금제도 등 미국 사회보장제도의 근간까지 마련하는 정책이었다. 실제 이때 미국사회의 노동, 복지, 금융 관련 주요 기관과 제도들의 원형이 대거 만들어졌는데, 노동자의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실업보험, 은퇴자&장애인 연금, 과당경쟁방지를 위한 공정거래제도, 빈민구제제도 등이 대표적이다. 즉, 뉴딜은 이해당사자 간 합의를 통해 새로운 질서와 제도를 만드는 과정을 본질로 둔, 말 그대로 '''새로운 거래'''였다.] 또 루스벨트 행정부 2기^^(1937 ~ 1938)^^ 경기 침체의 경우, 상기되어있듯 뉴딜 정책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고전학파적 견해와 의회 비협조나 [[폴 크루그먼|크루그먼]] 등이 주장하는 재정 지출 감소 때문에 오히려 뉴딜 정책을 지속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정반대의 견해가 대립한다. 사실 뉴딜 정책이 갖는 중요한 의의는 정책의 호불호를 떠나, 미국이 방임주의로 [[대공황]]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지만, 다른 지역이 [[파시즘]]을 대안으로 선택하던 시절 대중들에게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사회 내 극단주의자들의 성장을 억제하고 큰 틀에서의 기존 체제를 지켜낸 점이라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뉴딜은 일각에서 비난하는 공산주의스런 정책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공산주의로부터 자본주의를 수호한 수정자본주의적 정책이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일각에선 루스벨트가 2차 대전 당시 [[소련]]의 힘을 과대평가해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에게 너무 유화적이었던 것 아니냐고 비판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실제 2차 대전 기간 서방 진영 지도자인 루스벨트, 후임인 트루먼, 처칠 가운데 소련에 상대적으로 가장 호의적이었던건 루스벨트였는데, 그는 소련의 독일 분단안과 동유럽 공산화에 국민투표 등 몇몇 조건을 달긴 했지만 적극적인 반대는 하지 않았고[* 물론 후술되어있듯 이건 처칠 등 다른 지도자들도 결과적으로 비슷했다.] 대일 전선에서도 소련의 참전을 독촉하며 극동에서 소련의 지분을 용인하려 했다. 2차대전 승전이 확정된 1945년 2월에도 소련의 대일전선 참전을 독촉할 정도였다. 물론 이에 대해 일각에선 온전히 미국 vs 일본 상태로[* 더 정확하겐 중국도 있긴 했지만 사실 대륙 수비하기도 버거운 상태긴 했다.] 진행되던 태평양 전쟁에서 자국 병사들의 희생을 줄이고자 소련의 참전을 독촉한 것이란 해석도 하는데, 이에 대해 어차피 전쟁으로 피 보던 판국에 고작(?) 그런 이유로 잠재적 적국이 될 수도 있는 소련을 끌어들인건 현명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허나 이렇게 희생을 당연시하며 인명을 별 것도 아닌 것처럼 치부하는 것은 당시 미국이 상대하던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이나 할법한 발상이며 미국이 강조하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가치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게다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은 300만 이상을 동원했고 사상자는 50만에 가까웠으며 전비 또한 엄청났다. 당연히 감수할만한 희생이 아니었으며 빠르게 전쟁을 끝낼 필요가 있었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결국 소련의 부상과 냉전의 성립에는 루스벨트의 지분도 어느정도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루스벨트가 죽기 직전 병마에 시달리던 상황이라 총기를 잃고 나약해져서 그런 결정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 루스벨트는 말년에 가면 회담하는 것도 꽤 힘들어해서 실제 스탈린이 저 양반 오래 못살 것 같다고 측근들에게 얘기할 정도였다. 특히 [[얄타 회담]]에서 루스벨트가 소련에게 많이 양보한 것에 대해서는 FDR의 건강 이상을 감지한 스탈린이 질질 끄는 지연 협상 전략을 사용했고, 이에 루스벨트가 말려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만 대일전의 경우, 루즈벨트의 4번째 대선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프랑스보다 넓은 배후지인 만주에 상륙하며 피를 보는게 부담스러운 시기인 건 사실이다. 이러한 루스벨트의 대소 유화적인 태도와 상반되는 것이 후임자 [[해리 S. 트루먼|트루먼]]으로 그는 유럽이 되었든 극동이 되었든 소련의 지분 확대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실시한 [[베를린 공수작전]]과 [[마셜 플랜]]은 유럽에서의 소련 영향력 약화 차원이었고 빠른 원폭 투하 결정도 극동에서의 소련 지분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트루먼은 소련의 [[홋카이도]] 점령과 같이 비교적 작은 부산물에도 격렬히 반대했고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남한을 지키기 위해 즉각적으로 안보리를 소집해 한국에 파병할 정도로 소련과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높이 보았다. 다만 이런 주장에 대해, 사실 FDR은 전후 평화 체제의 핵심이 미소관계라고 봤기에 초강대국인 미국이 먼저 아량 넓게 손을 한번 내밀어본 것일뿐이란 반론도 있다. 실제 당시 소련은 대공황을 극복하고 제2의 경제대국으로 치고 올라온 상태긴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제 갓 농업국가를 탈피하고 공업국가로 진입한 신생국이었고, 특히 독일과 피비린내 나는 전면전을 치르면서 사실 미국 입장에선 좀 만만하게 볼법한 구석도 있었다.[* 당장 당시만 해도 거대 공산국가는 소련이 유일했다. 중국은 이때만 해도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중화민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또 당시 미국은 기존 전쟁 구도 자체를 바꿀만한 [[원자폭탄|혁신적인 무기]]를 [[맨해튼 계획|이미 연구]]하고 있던 상태였다.] 즉, 루스벨트가 사망하면서 모든게 IF의 영역이 되긴 했지만, FDR이 살아있었더라면 이때 쌓은 스탈린과의 친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전후 국제 질서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여담으로 FDR은 1942년 처칠에게 미국 국무부나 영국 외무부보다 자신이 스탈린을 더 잘 다룰 수 있다는 소신을 밝힌 적도 있는데, 스탈린 역시 FDR을 내심 경계했는지 유고슬라비아의 공산주의자였던 밀로반 질라스에게 '처칠은 사람들이 안볼 때 당신 주머니에서 잔돈만 훔쳐갈 인물이지만, FDR은 더 큰 동전 골라서 훔쳐갈 인물'이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들어 그린슈타인 교수는 FDR을 분석보다 직관을 더 믿은 정치인이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또 루스벨트가 소련에 호의적인 제스처를 처한 이면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있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FDR은 연합국 안에서도 여전히 [[제국주의]] 노선을 고집하는[* 처칠만 해도 승전국 식민지 독립 문제에 있어선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국가들의 방식은 낡은 것이라며 거부감을 표하기도 했다. 이런 연장선상인지 FDR은 중화민국 등에도 호의적인 편이었다. 사실 이 문제에 있어서 루스벨트만 비판받는건 좀 억울한 부분도 있는게, 당장 '동유럽에서의 소련 지분 확대를 막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베를린 진격을 주장했다'는 처칠과 영국 정부는 정작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1941년 6월 22일에 소련과 접촉해 동맹을 제의했으며 곧바로 동맹을 체결했다. 그리고 처칠은 1944년에 스탈린과 퍼센트 합의를 진행해 동유럽을 완전히 소련에 넘겨주고 남유럽에 대한 영국의 이권을 보장받으려 했다. 또한, 처칠은 지중해에서의 패권 유지를 위해 미, 소를 무시하고 이탈리아를 준 식민지로 취급했고 이 때문에 영국 정부는 폴란드 망명 정부를 보호하고 있었음에도 소련이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는 루블린 정부를 폴란드의 임시 정부로 공인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영국이 이 사안에 대해 항의하는 순간, 소련은 영국이 이탈리아에 점령주의 원칙을 적용해 자기들 마음대로 정권을 수립하고 교체한 일을 제기하며 영국의 항의를 무력화할 수 있었다. 게다가 처칠은 독일을 분할하고 완전히 무력화하는 미국의 모겐소 계획과, 스탈린의 독일 분할안에도 동의한 바 있다. 마치 처칠은 소련을 막으려 했는데, 루즈벨트는 용인하려 했다는 말은 처칠과 영국 정부가 소련과 협력하고 소련의 동유럽 장악을 용인하려 했다는 사실을 무시한 잘못된 평가이다. 그리고 독일의 분할은 소련에게 양보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논의되어 오던 전후 독일에 대한 다양한 처리 방안[* 미국의 5+1 분할, 영국의 2개국 분할안]들을 조정하여 얄타에서 결정지은 것이다. 폴란드를 위시한 동유럽 문제 역시, 루즈벨트와 스탈린, 처칠이 어느 한쪽에게 완전히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타협과 조정을 거쳐서 매듭지은 것이었다. 스탈린의 경우, 독소전 초기부터 전후 독일의 분할을 부르짖었으나, 냉전이 시작하던 유럽에서의 종전 ~ 포츠담 회담 시점에는 기존의 입장을 버리고 비무장 중립화된 통일 독일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했으며 포츠담에서 트루먼, 애틀리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론을 내리자면, 전후 독일의 분할은 소련의 분할안을 따른 것이 아니며, 스탈린도 상황에 따라서 분할이 아닌 통일 독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기도 했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소련을 잠재적 적국으로만 판단하는 것도 상황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단견이다. 루즈벨트는 독일군의 80%를 상대한 소련에게 어느 정도의 양보를 하는 것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를 용인받았다. 스탈린 또한, 미국이 주도하는 대연합에 합류하는 대신, 소련의 안보와 적대 국가들[* 독일, 일본]의 무력화를 보장받았다. 루즈벨트의 미국과 스탈린의 소련은 얄타까지만 하더라도 서로를 적대할 생각이 없었다. 스탈린은 세계 혁명과 공산권의 확장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독일과 일본의 무력화, 소련의 안보를 위한 동유럽의 완충 지대 확보에 몰두했다. 서유럽 국가들이 두려워하던 유럽 전역에서의 공산 세력의 강화에 대해서는 서유럽과 그리스의 현지 공산 세력을 통제하고 혁명 운동을 막겠다는 약속을 했으며 실제로 스탈린은 냉전이 본격화되던 시점에서조차 그리스 공산 파르티잔들의 활동을 통제하려 했다. 자신이 완충 지대로 삼으려 한 동유럽 국가들도 루즈벨트의 눈치가 보여 의회제와 시장 경제를 허용하는 인민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으로 끝내려 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전후에도 어느정도는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다. 스탈린은 자신을 제외한 소련 수뇌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시장을 개방하여 과학 기술과 공산품을 받는 대신, 소련의 원자재를 미국에 넘겨주려 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전후 세계를 인정하고 미국이 만든 세계 질서를 받아들이려 했고 루즈벨트가 구상하여 실현한 [[UN]]에 소련이 가입한 것도 소련이 미국의 전후 구상을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이다. 동아시아에서도 스탈린은 미국의 눈치를 봐서 제정 러시아의 고토를 회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극동에서의 진출을 정당화했으며, 루즈벨트도 이를 받아들였다. 만약, 스탈린이 그 이상을 원했다면, 루즈벨트는 스탈린과 다시 길고 긴 협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관동군에 대한 평가는 핵 2방 맞고 항복한 지금에 와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모든건 결과론적 해석일 뿐이며 그때 당시 일본 관동군은 미드웨이와 과달카날 패배 이후에도, 만주와 한반도를 손아귀에 쥐고 있었으며 그 숫자만 100만에 가까웠다. 미군 수뇌부와 백악관은 일본 본토에 침공하는 [[몰락 작전]]을 개시할 경우,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미국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소련이 제2전선 개설을 지속적으로 요청하던 것처럼 자신도 소련에게 대일전에 참전할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이탈리아 전선의 개설과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개시는 전후 지분의 확보만을 위해서 이뤄진 일이 아니라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소련의 제2전선 개설 요청을 받아들여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하여튼 이렇게 다양한 평을 남긴 대통령이지만, 결과적으로 [[세계 대공황|대공황]]을 극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오늘날 초강대국 미국의 기반을 마련한 대통령이었다는 것에는 많이들 공감하고 있기에 FDR은 오늘날에도 대통령 업적 평가 등을 보면 주로 '''최초의 미국'''을 만든 [[조지 워싱턴]], '''최대의 미국'''을 만든 [[에이브러햄 링컨]] 등과 더불어 '''최강의 미국'''을 만든 지도자로서 세 손가락 내로 드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2010년 시에나 대학의 업적 평가에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2000년대 한 조사에선 지도력, 인사, 위기 대응 등 다른 분야는 수위권인데, 도덕성에서 상대적으로 처지는 15위를 차지해 종합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